'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쓰기는 한국어, 문장 구조는 영어
한국어에 번역 투 표현이 침투하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를 영어로 바꾸면?
외래어만 줄인다고 우리말을 지키는 게 아니다. 차라리 외래어는 첫눈에 구분되기 때문에 바로잡기 편하다. 진짜 무서운 건 번역 투이다.
영어 문장 'Have a good time.'을 직역한 말,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를 생각해보자. 사실 한국어 체계에서 이 문장은 좀 어색하다.
한국어는 영어보다 훨씬 문장 성분의 생략이 자유롭다. 예를 들어 '사랑해'를 보면 말하는 사람이 '나'이고 듣는 사람이 '너'라는 게 확실하면 그냥 '사랑하다'라는 동사만 활용해도 문장이 완성된다. 반면 영어에서는 'I love you'라고 표현해야 완전한 문장이 된다. 주어, 동사, 목적어가 다 들어가야 한다. 가끔 줄여서 'Love you'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이는 더 가벼운 느낌이다.
그렇다면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라는 의미로 문장을 만들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형용사로 쓰인 '즐거운'을 부사로 바꾸고 그리고 'time'을 직역한 '시간'을 빼면 된다. '방학을 즐겁게 보내다'라거나 '휴가를 즐겁게 보내다' 등 상황에 따라 다양한 표현이 가능하다.
번역 투 표현의 부작용, 조사 남발
번역 투 표현의 문제점은 기존 언어의 문장 구조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문법 상 뚜렷한 잘못이 없기 때문에 번역 투라는 것을 쉽게 인지하지 못한다.
굳이 동사 한 개로 표현할 수 있는데 '목적어+동사' 구조로 바꾸어 표현하는 것도 이에 해당한다.
여행을 하면서 내가 찾는 경험은 ‘살아 있구나’라는 실감이다. [《여행의 말들》, 이다혜, 유유 출판사]
여기서 '여행을 하면서'라는 구절은 '여행하면서'라고 쓰는 편이 더 깔끔하다.
해 질 녘 강가에 서 있다가,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걷다가, 불꽃놀이를 보다가, 소풍 가는 아이들을 보다가, 식사를 하다가 갑자기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른다.[《여행의 말들》, 이다혜, 유유출판사]
이 문장도 마찬가지이다. '식사를 하다가'는 '식사하다가'로 바꾸는 게 알맞다. 사전에 '식사하다'라는 단어가 있는데 굳이 조사 '를'을 추가할 이유가 없다.
보통 한자어와 '하다'가 더해진 동사를 쪼개 쓰는 사례가 많다. 목적어와 동사가 결합한 영어의 문장 구조를 그대로 받아들인 영향으로 보인다.
페니는 무의식적으로 대답을 하고 '아차!' 싶었다. [《달러구트 꿈 백화점 2》, 이미예]
이 문장 역시 조사가 불필요하게 들어갔다. '페니는 무의식적으로 대답하고 '아차!' 싶었다.'라고 하는 편이 더 매끄럽다.
이번 주에만 특별히 할인된 가격에 피자 세트 메뉴를 먹을 수 있는 데다, 선불로 계산을 하면 식후에 진한 자두 맛 아이스티를 무제한으로 먹을 수 있는 쿠폰까지 주는 행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달러구트 꿈 백화점 2》, 이미예]
'계산을 하면' 또한 '계산하면'으로 바꿔 써야 한다.
그럼 짝사랑 상대와 함께 위기 탈출을 하며 애틋해지다가 포탄이 날아드는 전시상황을 배경으로 키스를 퍼붓는 꿈? [《달러구트 꿈 백화점 2》, 이미예]
이 문장에서는 '위기 탈출을 하며'가 어색하다. 이럴 땐 '위기를 탈출하며' 식으로 바꿔주는 것이 좋다. 비슷한 예로는 '연봉협상을 하다'를 '연봉을 협상하다'로 '상황 파악을 하다'를 '상황을 파악하다'로 바꾸는 것이 있다.
이처럼 현재 우리가 쓰는 말 속에는 알게 모르게 영어식 표현과 구조가 섞여 있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즐거운 저녁 시간 보내세요 등의 표현이 대표적이다. 이밖에도 찾아보면 일본어 번역 투 표현도 상당하다. 언어는 화자의 사고를 규정하는 강력한 도구이다. 한 번쯤은 우리가 쓰는 표현이 어디서 온 건지 점검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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